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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 - 팩트폭격, 3강 폭력에 끌리는 이유

셩잇님 2023. 7. 2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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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폭력에 끌리는 이유

 

 제가 여러분과 나눌 오늘 이야기는 인류의 진보입니다. 인간은 폭력적인 장면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보려고 돈을 냅니다. 그게 우리 오락거리입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그렇고, 성경도 그렇습니다. 마피아 영화, 전쟁 영화, 첩보 영화, 그리스 비극에도 나오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폭력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합니다. 이는 아마 인류 진화 역사에서 폭력이 늘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위협이라도 일단 벌어지면 재앙이 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폭력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방어하는지, 또 어떻게 반격하는지 아는 사람은 생존에 유리합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폭력에 이끌리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거대한 오락 사업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질문을 많이들 합니다. "인간은 원래 폭력적인가?. 아니면 평화롭고 협력적인가?"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곧 폭력의 역사입니다. 전쟁, 강간, 살인, 폭동, 테러리즘이 항상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에 따른 폭력 범죄 발생률을 살펴보면 보다시피 감소 중입니다. 즉 폭력이 일정하게 계속 발생해 온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정말 복잡합니다. 폭력에 대한 동기, 평화와 협력에 대한 동기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폭력의 동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착취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땅이 탐날 수 있습니다. 그 땅을 갖기 위해서 주인을 때려죽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또 재산이나 여자가 탐나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지배의 동기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 위에 서기를 원합니다. 권력이나 지위, 유명세를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복수의 동기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해쳤을 때 피해자는 자신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도 폭력의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노동 계급이 부르주아와 귀족을 굴복시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폭력이 뒤 따릅니다.

 

 반면 우리는 비폭력적인 본성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것을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시적 은유입니다. 거기에는 공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고통에 속상해합니다. 우린 자제력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에도 있지만, 일단 참고 물러서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이성과 지식도 있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범죄와 전쟁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폭력을 줄일 방법들을 고안해 냅니다. 또한 우리에겐 도덕적 정서가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 몇 가지 있는데 폭력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는 내면의 악마로 불리는 악한 본성과 선한 본성 사이에서 항상 줄타기를 해왔습니다. 

 


 

Q. 인간은 폭력을 통제할 수 있을까?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하나 제시합니다. 무정부 상태에서 인간은 폭력에 위협에 노출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선천적으로 사악해서가 아니라, 공포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이 나를 공격할 것이 두려워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웃도 같은 생각이라면, 똑같이 먼저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복수를 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거나 모욕하면 내가 그런 일을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또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위협과 모욕에 대한 앙갚음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폭력은 정말 정말 발생하기 쉽습니다. 악한 본성이 없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상쇄시킨다.' 폭력 한 번에 복수 한번. 공평합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만약 내가 상대를 공격한다면 그건 정당한 것입니다. 정의구현이고 당연히 해야 할 복수인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날 공격한다면 그건 도를 넘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양쪽이 똑같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최초의 폭력은 제3의, 4의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폭력의 순환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전쟁은 실제로 이렇게 일어납니다.

 


 

Q. 그렇다면 폭력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제안합니다.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바다 괴물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제지하는 정부나 왕, 의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정부가 사적인 폭력을 불법화한다면 개인, 집단, 지방 도시는 서로 공격하는 것을 멈출 것입니다. 폭력을 행사한다면 리바이어던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웃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게 됩니다. 이웃도 리바이어던의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홉스가 정부를 설립함으로써 폭력 범죄를 줄이고, 내전을 억제할 수 있을 거라 예상을 한 이유입니다. 사실 지금도 무정부 상태에 있는 지역들을 살펴보면 공격과 공습, 보복, 복수 등 잔혹한 범죄와 혈투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중세 유럽의 연간 사망자 통계가 있습니다.

 

 

 매년 10만명 중 25명에서 35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지금의 서유럽 국가에서는 그 수가 10만 명당 1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한국 역시 범죄율이 매우 낮은 편입니다. 복수라는 갈등 해결 방식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법원, 경찰, 사법 제도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국제적으로도 작용합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리바이어던은 없지만, 차선책인 UN이 있습니다. 아마 다들 세계통합정부를 원치는 않습니다. 대신 여러 협정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EU, 아프리카 연합처럼 국제 연합체도 있습니다. 진짜 리바이어던보다는 훨씬 작지만 한 국가보다는 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홉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리바이어던은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시민들을 탄압할 위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사람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은 해결책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홉스'가 이야기했던 무정부 상태의 폭력, 즉. 만인에 만인의 대한 투정을 막고, 정부가 시민들을 탄압하는 독재를 막는 장치로 발동합니다.

 

 정부의 통제는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웃국가가 안전하다고 생각된다면, 사람들은 군사력이나 무기에 더 이상 돈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미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 돈을 환경보호에 쓰거나, 시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군사력에 투자하는 금액을 줄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 세계는 비폭력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유럽입니다. 유럽은 한 때 지구상에서 가장 유혈이 낭자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에는 단 한차례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동유럽에서 조차 아주 드물게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한 뒤로는 유럽에서 모든 전쟁과 정치적 폭력이 사라졌습니다.

 

 북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캐나다와 미국이 전쟁을 하던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미에서는 이제 막 마지막 전쟁이 끝난 참입니다. 콜롬비아 정부는 공산주의 게릴라 집단이자 무장 혁명군 FARC와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지구 서반부의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동아시아를 살펴볼까요? 물론 한국은 잠재적인 위협이 있는 나라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53년 이후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엔 꽤 평화로웠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지역들이 저마다 평화를 구축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세계는 점점 더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안전과 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복과 복수도 항상 뒤따를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려면 우리에게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착취보다는 협력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보장하는 제도 말입니다. 

 

 무역과 거래가 그러한 제도 입니다. 고객을 죽일 일은 없습니다. 체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사는 게 이득이라면 폭력보다는 상거래를 선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규칙을 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만약 중립적인 제삼자. 심판이나 법관, 사법 체계가 존재한다면 자기 이익을 주장하려고 굳이 폭력을 휘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제삼자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더 공감할 수 있다면 상대도 즐거움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그들의 아이를 사랑하고, 안전하게 살길 원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공정하게 대하려 노력하고 착취하려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평화의 협력을 이루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법, 사회, 규범, 철학, 종교를 재정비함으로써 평화를 더욱 바람직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진보를 이루자고 인간 본성을 바꿀 순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진화를 통해 변화는 것입니다. 진화는 몇 세대의 걸쳐 일어나는 행동입니다. 종의 변화는 그렇게 수 천년의 걸쳐 일어납니다.

 

 우리는 딱히 본성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또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해결책은 그런 방식을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제도, 지식, 규범, 법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해결책이 더 나은 본성, 즉 에이브러햄 링컨이 얘기했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에 힘을 실어줍니다.

 

 또한 우리의 파괴적인 면을 억제해줍니다. 우리는 여러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부, 법치, 과학, 국제기관, 평화조약, 올바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규칙과 규범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내면에 있는 악한 면을 최대한 억누르고, 선한 본성이 지배하게끔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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