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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 - 팩트폭격, 2강 우리를 유혹하는 나쁜 뉴스

셩잇님 2023. 7. 2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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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우리를 유혹하는 나쁜 뉴스

 

 저는 오늘 인류의 진보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대에 태어나고 싶으신가요? 단 성별이나 인종, 국적, 지역을 고를 순 없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미국 어디에 살지는 모르지만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저널리즘의 왜곡이 한몫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재난은 생기고 그것이 뉴스가 됩니다.

 

 뉴스는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최악의 일들을 작위적으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세상의 끔찍한 소식을 접하고 이 세상이 점점 더 흉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일어난 나쁜 사건일 뿐입니다. 세상이 더 나아지는지, 나빠지는지 알려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야 합니다.

 

 뉴스는 어제, 오늘 일어난 사건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역사의 발전과 전체 흐름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뉴스는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국가, 테러가 없는 국가, 팬데믹이나 경제공황이 없는 국가는 뉴스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건이 없다면 뉴스가 되지 못합니다.

 

 즉 뉴스는 본질적으로 나쁜 사건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화보다는 혼란스러운 사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뉴스의 타고난 편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편향성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어둡고 우울한 비관론을 선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뉴스가 속보로 다루는 것은 대부분은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은 일어나는데 보통 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매일 13만 7천 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으로부터 매일 조금씩 벗어나...' 하지만 그건 절대 헤드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몇십여 명이 극빈층에서 탈출했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몇몇 기자들은 나쁜 뉴스를 의무이자 책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어떤 기자가 책에 말하더군요. 좋은 뉴스는 뉴스가 아니고, 홍보고 광고이다! 아니면 정부의 선전이다.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이해하려면 무엇이 잘 되고, 잘못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나아졌는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답할 수 있나요?

 

 물론 제가 세상의 많은 부분이 진보해 왔다는 자료를 보여주어도 가령 전쟁 사상자나 가난이 줄었고, 문맹률이 낮아졌음을 보여줘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 참 긍정적이시네요. 긍정적인 건 좋은 것입니다. ^^*" 이는 제 말의 요점을 완전 놓친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건 개인의 성향입니다. 타고나길 긍정적인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컵에 물이 반이나 찼단 사람도 반밖에 없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성향이 무엇이 중요한가요? 제 성향이 세상의 대한 진실을 가리면 안 되겠죠. 제 요점은 우리가 객관적인 데이터와 수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잘못된 통념은 데이터가 아닌 뉴스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나쁜 뉴스에 끌릴까?]

 

 심리학에는 부정성 편향*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있습니다. 잘된 일보다는 잘못된 일에 더욱더 관심이 쏠리고, 칭찬에서 받는 기쁨보다는 피반에서 받는 상처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언어에는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더 많습니다. 어떤 사건이 반복되면 우린 혹시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습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세상을 발전시킨 인간의 독창성과 행동성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 부정성 편향 =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 더 주목하고 휘둘리는 방향성

 

 또 심리학에는 가용성 편향*이라고 불리는 현상도 있습니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이 발견했습니다. 카너먼은 이를 비롯한 여러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우리는 특정 사건의 가능성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빈도나 위험도 같은 객관적인 자료가 아니라 사건이 우리 머릿속에서 얼마나 쉽게 떠오르는지에 따라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달리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 가용성 편향 = 자신의 경험이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에 근거해 판단하는 인지적 경향성

 

 따라서 누가 상어에게 물렸던 기사를 신문에서 보게 되면 우리도 상어에 물릴 위험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에 별로 나오지 않지만 실제로 교통사고 죽는 사람이 상어에 물려 죽을 확률보다 약 44,747배 높습니다. 또 호흡기 질환이나 다른 사고들이 훨씬 더 위험하지만 그런 건 쉽게 떠올릴 수 없으니 일어날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상어가 공격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잘못 판단합니다. 테러리스트 공격이나 무차별 총기 난사, 비행기 사고도 같은 경우입니다. 사망자는 소수지만 유혈이 낭자한 장면은 잊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용성 편향입니다. 

 

 또 이런 현상도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보다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사람들을 더 교양 있고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위험을 경고해 주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특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데이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인류의 진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토대로 세상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 사건의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특정한 사건은 세상의 모든 일을 대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작위적은 표본에 불과합니다. 만약 특정한 날의 발생한 최악의 사건들에만 주목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과학, 민주주의, 국제기관, 자선단체 등 모든 제도가 실패했고, 가망이 전혀 없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봤자 소용없어. 그냥 완전히 다 박살 내 버리자. 차라리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낫지.' 이러한 생각을 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았고, 성공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닙니다. 이는 기적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전보다 더 오래 살고, 가난과 질병, 문맹률, 전쟁도 줄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행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뉴스에서 벗어나는 법]

 

 저는 언론인이 더 많은 데이터와 통계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대부분의 언론인은 대중을 각성시키길 원하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물론 몇몇 회의주의자들은 언론인을 조회 수와 광고에 혈안 된 낚시꾼으로 여기긴 합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론인은 진심으로 대중에게 깨달음을 주고 싶어 합니다. 깨어있는 대중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언론인이 데이터나 전체 동향을 제공하는 데에 보다 깊은 책임 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범죄가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범죄 증가 추세를 보여주는 건지, 줄어드는 추세에서 발생한 단순 사건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언론인들이 반박합니다. "그렇게 못해요. 사람들은 통계를 싫어하거든요. 숫자보다 그림, 이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뉴스 사이트에서 스포츠 뉴스를 읽는 사람들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의 점수를 확인하기 위해 차트나 표를 찾아봅니다. 사업가들도 데이터를 봅니다. 주식 시장의 시세에 환율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일기 예보를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뉴스를 보는 사람들을 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제공받아야 합니다.

 

 저는 뉴스 사이트의 시간의 따른 범죄율을 보여주는 일종의 계기판을 마련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살해된 사람의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내전 발생' 이런 뉴스뿐만이 아니라 지난 5년, 10년, 50년 동안의 전쟁 빈도를 보여줘도 좋겠습니다. 단순히 태양광 발전을 늘리자고 주장하는 대신에, 탄소 배출량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좋습니다.

 

 저널리즘의 오해와 왜곡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전체적인 동향에 더욱더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는 것, 기억하는 것들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믿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데이터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작되기도 하거나 가짜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뉴스도 거짓일 수 있습니다. 또 완전하지 않은 데이터가 오해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기자, 과학자, 통계학자, 작가들이 데이터 출처를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표성이 있는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정보를 얻을 때에는 하나의 웹사이트나 신문 대신에 서로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여러 출처에서 데이터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문은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인지, 우파 성향인지에 따라 편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얻은 지식만으로 세상을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정확도나 사실성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그 알고리즘은 클릭을 유도해 이용자가 앱을 계속 이용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제도가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실에 닿을 수 있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진실을 추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편향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이 따르는 정당, 대의, 종교가 가장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편향성을 최소화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정부에는 삼권분립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위헌 법률이 생기면 법원이 그 법률을 기각할 수 있습니다. 정부조차도 그 권력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들의 감시하에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검사와 변호사, 양측의 법정 대리인이 균형을 이룹니다. 기자는 원고를 작성한 후에 그냥 내보내지 않습니다. 취재가 충분한지, 사실 관계가 맞는지를 편집자가 먼저 확인합니다. 이렇듯 정보의 진위 여부를 검토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제도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현실을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 개진 = 어떤 사실이나 내용을 글이나 말로 밝히어 펼치는 것

 

 우리는 사실과 데이터의 기반해 이 세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점쟁이나 예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항상 불안전하고 역사적인 기록들 조차 결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불안전한 지식이 독단적인 주장보다는 낫습니다. "내가 답을 가지고 있어. 난 천재야. 신이 내게 말했어." 이런 주장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 말들은 보통 재앙을 불러옵니다. 우리가 무작정 행동한다면 상황은 더욱더 나빠질 것입니다. 세상은 정답보다 오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서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어떤 신조만을 따른다면 그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어야 합니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수를 고칠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과거 자료를 찾아보거나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정책을 만든다면 먼저 한 지역에서 시도해 본 다음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을 만들 경우 피 실험자 절반에게는 진짜 약을, 나머지는 가짜 약을 줘서 실효성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진보시킬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더욱 잘 이해하는 것이고, 이건 데이터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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