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동물 해당 : 이론편
주제 : 동물은 윤리적 대상인가?
18세기와 19세기에 살았던 한국의 사상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로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은 살아있으며 성장합니다. 하지만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순 없습니다. 식물에게는 삶이 무엇인지를 느낄만한 내면세계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동물이 있습니다. 동물은 살아있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지각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는 식물과 달리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즐길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돼지와 식물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즉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고 성장하며 감정을 느끼며 지각이 있는 존재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인간에겐 또 무엇이 있을까요? 다산 정약용은 "인간에게 영과 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영이라는 말이 명확하지 않아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돼지보다 더 복잡하고 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윤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할 윤리 말입니다. 따라서 전 여러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도덕적 차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즉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도덕적 기준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기준으로 도덕적으로 중요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어떤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어떤 존재를 보호해야 할까요?
[도덕적 지위의 기준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아시다시피 과거의 우리 인간 사희는 이와 같은 도덕적 지위의 기준을 아주 좁게 잡았습니다. 사실 초기 부족사회는 도덕적 고려대상이 부족 구성원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언덕 너머에 사는 부족인데 다른 부족 영토에 들어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고 하면 그러면 살해당할 수 있습니다. 단지 다른 부족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사회가 발전하고 확장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대상의 범위도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국가라는 더 큰 단체의 일원을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또 종교가 같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종교가 다른 사람은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즉 도덕적 지위의 범위가 점점 확장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회들은 같은 인종에게 더 큰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고 다른 인종에겐 그런 지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아마 18세기 유럽사회와 19세기 초 일부 유럽사회를 살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인은 법률로 권리를 보장받았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은 납치당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상품처럼 농장으로 팔려가 강제로 일해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는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20세기 초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치 독일은 아리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인종에게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를 살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종이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그런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은 세게의 인권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권리가 있고, 이를 보호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는 분명 커다란 발전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고수했던 편협함과 또 수십 년 전의 인종 차별을 생각해 보세요. 이는 박수받아 마땅할 발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 인권 선언까지 했으니 이제 더 이상 도덕적 지위를 확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 지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하고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 차별과 인종 차별은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들을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왜 다른 종은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종 차별과 과거의 인종 차별사이에 정말 차이가 있을까요? 인종 차별 역시 특정 인종의 일원이 다른 인종이 누리지 못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 차별이나 인종 차별이나 모두 권력 그룹이 있습니다.
18세기 유럽인은 아프리카인 보다 기술력이 뛰어나고 강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인을 잡아 노예로 만들고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면 그러니까 우리의 권리에 구분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종 차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요? 인간과 동물을 종이라는 기준 선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것을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우린 식량을 얻기 위해 동물을 기르고 죽입니다. 제품 실험을 위해 실험실에서 이용하기도 합니다. 우린 동물을 이용하고 그 행동을 정당화할 이데올로기를 만듭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 차별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면 과거 철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볼까요?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차이를 정당화했습니다.
[예시 1]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우리가 더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을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없는 존재는 더 이성적인 존재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제도도 옹호했습니다. 또 그리스인 소위 야만인보다 더 이성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린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인이라고 노예보다 더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 중에도 남보다 더 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동물보다 특별히 더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지적장애로 인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떤 일을 수행한다고 해봅시다. 경우에 따라선 동물보다 더 잘하지 못할 때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우린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을 우리가 착취하는 동물과 절대 똑같이 취급하지 않습니다. 일부로 살을 찌워 잡아먹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며 실험용으로 이용하지도 않습니다. 약물의 안전성을 실험하기 위해 끔찍한 고통을 가하거나 죽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기준이 이성은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시 2]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의견을 살펴보겠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자의식 때문에 특별하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인간을 대할 때 항상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목적을 위한은 수단일 뿐이며 수단으로 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칸트가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자의식과 자기 인식 능력입니다. 칸트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자율성에 대해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칸트는 그 자율성을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의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뇌가 심각하게 손상되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기에 자율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동물은 일부 인간보다 더 자의식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침팬지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자의식이 드러납니다. 침팬지는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침팬지가 잘 때 물감으로 이마에 점을 찍습니다. 그리고 하루 지나서 잠에서 깬 침팬지에게 거울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거울을 보면서 이마를 문지릅니다. 이마에 있는 점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한 뇌손상을 입은 환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칸트의 논리대로라면 침팬지는 목적이 되어야 하고, 뇌 손상 환자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의식이 인간과 침팬지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보다 공리주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의 입장이 훨씬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기준에 대한 제러미 벤담의 생각은?]
벤담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 경계선은 도덕적 권리를 부여하는 기준을 의미합니다. 벤담이 살아 있던 시절시절인 1789년에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발생했는데 바로 이 프랑스혁명 덕분에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들이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목격한 벤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사람을 노예로 삼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음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했습니다. 18세기로서는 아주 계몽적인 발언입니다.
"어쩌면 언젠가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털이나 꼬리의 유무는 기준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것은 누군가에게 도덕적 권리를 부여하거나 다른 존재를 학대할 자격을 부여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 다음 벤담은 이렇게 묻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말할 수 있는 능력인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인가?" 그리고 저와 같은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벤담은 아기로 예를 들었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기는 동물보다 말을 더 잘하지도, 더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못합니다. 따라서 그런 기준으로 권리를 가질 자격을 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벤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사유 능력이나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것이 벤담의 중요한 기준선입니다.
그리고 전 벤담에 동의합니다. 동물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동물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권리가 있듯이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인간과 동물을 하나로 묶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은 인간과 동물이 식물과 구별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처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존재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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