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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 - 실천윤리학, 5강 어떻게 살 것인가?

셩잇님 2023. 6. 2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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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어떻게 살 것인가?

주제 :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좋은 삶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이번엔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제 할아버지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빈에 살았고, 그곳에서 한편의 원고를 쓰셨습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에 대해서 입니다. 제가 할아버지가 쓰신 그 원고를 스튜디오로 가져왔습니다. 물론 독일어로 쓰셨습니다. 이 원고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에서 발췌한크로이소스 왕과 현자 솔론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되어있습니다. 

 

 지혜로움으로 명성이 자자한 현자 솔론이 크로이소스를 찾아옵니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이런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물론 왕이십니다. 부자에 권력자이시고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론의 답은 달랐습니다. 텔루스라는 아테네인 이름을 대었는데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크로이소스는 놀라서 솔론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대는 왜 그자가 행복하다고 하는 건가?" 솔론이 답했습니다. "텔루스는 아테네라는 번성한 국가에서 좋은 삶을 살았고 또 영광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시민들은 존경을 표하며 텔로스의 장례를 치루어주었습니다." 제 생각에 할아버지가 원고에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인의 좋은 삶에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철학자입니다. 저희 철학자들은 좋은 삶을 이루는 근간을 탐구하는데에 조금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그저 개별요소들을 더한 것일까요? 아니면 개별요소 밑에 근간이 되는 무언가가 즉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핵심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철학자들이 좋은 삶의 기준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해왔습니다. 

 


 

[좋은 삶을 위해, 검토할 이론]

[완전론]

 먼저 완전론입니다. 인간의 본선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덕이 있는 삶은 우리의 본성에 따르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본성을 갈고 닦아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우리 본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본성의 모든 요소가 마치 재능처럼 갈고닦을만한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인간 본성에 대한 찰스 다윈의 이론은 상당히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우리 본성이 지금처럼 진화한 것은 그 본성 덕분에 우리 조상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자손이 생존할 수 있게한 본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덕과는 정반대로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공격성이 그런 본성입니다. 한 그룹의 일원이 다른 그룹의 구성원을 없애고, 번식하려는 영토를 확장하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영역을 확장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손들도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 인간 본성이 본래 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본성에는 선한 요소도 있고, 악한 요소도 있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본성을 따르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이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욕구 충족 이론]

 다음은 욕구 충족 이론입니다.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이론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뭘 원하는지 압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우린 행복해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좌절하거나 불행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욕구의 동등하게 적용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은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욕구인지, 아니면 단지 욕구일 뿐인지 말이죠.

 

 철학자인 존 롤스가 한 사람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의 절실한 욕구는 잔디밭에 있는 잔디를 모두 세는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잔디가 무성한 잔디밭을 발견했다고 해봅시다. 아시다싶이 이 사람의 욕구는 잔디밭의 잔디 개수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잔디를 세기 시작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잔디밭에 잔디를 모두 세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봅시다. 즉. 욕구를 충족한 것입니다. 그는 좋은 삶을 산 것일까요?

 

 좋은 삶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의미한 삶처럼 느껴집니다. 또한 잔디 수를 세는 데에 성공해서 욕구를 충족하긴 했지만, 저는 그 사람이 욕구를 충족한 결과 진정한 행복에 도달했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행복이라는 요소가 나왔으니 이번엔 세번째 이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쾌락주의]

 마지막으로 쾌락주의입니다. 가장 가치있는 인생은 쾌락이나 행복을 최대화하고 고통은 최소화 하는 입장입니다. 이 이론에도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불행하기보다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은 좋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좋은 삶에 대한 이 쾌락주의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의 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명은 20세기 철학자 로버트 노직입니다. 노직은 그의 저서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에서 한가지를 제안합니다. 과학자들이 경험 기계라고 불리는 기계를 하나 만들었다고 상상해보라고요. 경험 기계는 사람이 안에 들어가 누울 수 있는 캡슐처럼 생긴 기계입니다.

 

 기계 안에 들어가면 내부는 온통 캄캄하고 머리에 전극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 전극에는 프로그램이 되어 있습니다. 원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그저 원하는 경험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에레베스트 산에 오를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큰 파도를 탈 수 있습니다. 머리에 연결된 전극을 통해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노직이 지적하는 것은 만약 쾌락주의가 옳다면 혹은 욕구 충족이 이론이 옳다면 최고의 삶이란 경험 기계 안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가장 즐거운 경험을 하거나 혹은 가장 하고 싶은 경험을 하면서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직이 이 사례를 통해 쾌락주의 이론을 반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최고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좋은 삶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삶에 거부감을 느끼나요? 그렇다면 심리학자들이 현상 유지 편향*이라고 부르는 심리적 요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현상 유지 편향이란 새로운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실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낯선 것을 시도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인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도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현상 유지 편향 = 새로운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심리적 편향

 

 이를 실험하기 위해 한 연구자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경험 기계 안에 상상해보라고요. 여러분도 지금 기계 안에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하는 모든 경험은 진짜가 아닙니다.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 일생 일대의 선택을 해야합니다. 당신은 경험 기계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 밖의 삶은 어떨 지 알 수 없습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기계 안에 그대로 머물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전처럼 계속 이어지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계속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고 묻자 많은 사람들이 기계 안에 머물겠다고 답했습니다. 경험 기계 안에 들어갈 때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기계 안을 선택했습니다. 이 실험 결과는 사람들이 경험 기계를 거부하는 이유가 현상 유지 편향때문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직의 경험 기계가 쾌락주의에 회심에 일격을 날린 반박이라고 하지만 전 동의하기 힘듭니다. 쾌락주의는 여전히 옹호할만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 얘기하겠습니다. 물론 경험 기계 안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말입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한가지 지적하고 싶습니다. 단지 물질적 생활 수준이 높을 수록 행복한 삶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더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많은 물건을 사고 더 좋은 차와 더 큰 집 더 많은 가구를 사고 더 멋진 휴대폰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소비는 지속적인 행복을 안겨주지 않습니다. 새로운 소비를 할 때마다, 새로운 상품을 살 때마다 한동한 쾌락을 느끼긴 합니다. 하지만 그 쾌락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쾌락 수준을 유지하려면 끝없이 사고, 또 사야합니다. 계속 말입니다.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일단 수입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그 이후에는 수입이 더 오른다고 해도 행복이 미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다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그런데 더 지속적인 만족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지닌 가치에 따르는 삶을 살면서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많은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예를 들어 한 연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두 그룹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20$씩 돈을 주었습니다. 그 후, 한 그룹에는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했으며, 다른 그룹에는 다른 사람을 돕거나 기쁘게 하기 위해 이 돈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때 쯔음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어땟나요? 기분이 어땠는지, 즐거웠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쓴 그룹보다, 타인을 돕거나 타인을 위해 돈을 쓴 그룹이 더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고 답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쾌락주의의 역설* 입니다. 쾌락주의의 역설이란 직접적으로 쾌락을 얻으려 할 경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여러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물건을 사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쾌락을 얻으려 한다면 행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다른곳에 목표를 둔다면, 이를테면 타인을 행복하게 한다거나, 내가 가진 기술을 갈고닦는다거나 혹은 게임을 할 때에도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즐긴다면 행복을 얻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최종 목표가 행복이라고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 쾌락주의의 역설 = 헨리 시그윅이 윤리학 방법론에서 제시한 것으로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쾌락,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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