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왜 공리주의인가?
주제 :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이번 강의에서는 몇가지 윤리적 질문을 통해 공리주의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무엇이 옳은것일까요? 또 어떻게 살아가야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공리주의에서는 이렇게 답합니다. "옳음이란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선택 중 최선의 결과를 낳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최선의 결과는 나만을 위한 것이여서는 안됩니다. 행동의 영향을 받는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모두란 현재는 물론이고 고려할 수 있는 미래의 사람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공리주의는 다른 도덕 관점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보자면 공리주의는 다른 도덕관점과 다릅니다. 일정한 도덕 교칙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일반적으로 따르는 도덕규칙 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마라." 와 같습니다. 공리주의는 일반 도덕 규칙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특이한 상황이 발생해 그 규칙이 최선의 결과를 낳지 못한다면 공리주의는 그 규칙을 따르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시 1]
우린 최근 그런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입니다. 기존 규칙을 따르는 것이 효율적이지 못한 혼돈의 상황이었습니다. 몇몇 국가에선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중환자실 병상 수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 산소통이 필요한 사람처럼 위급한 환자를 다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국가에선 의사들이 중환자실에 들여보낼 사람과 들여보내지 않을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일반적인 상황 즉 팬데믹이 아닌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먼저 오는 사람이 먼저 입원하는 것이 규칙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한다면 입원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기간 만큼 얼마든지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팬데믹 중에 그러한 규칙을 따르면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상태가 심각하여 생존 가능상이 거의 없는데에도 오랫동안 중환자실 침대를 차지한다고 예를 들겠습니다. 그러면 생존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도 치료를 못 받습니다. 그래서 일부 국가에선 의사들이 규칙을 변경합니다. 내보내면 죽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내보냈습니다. 살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환자를 중환자실 밖으로 내보내는 결정은 의사로서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공리주의에선 이것이 옳은 행동입니다. 이런 경우 공리주의가 논란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두에겐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집니다. 물론 특정 도덕규칙을 따르지 말라는 이런 공리주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입니다.
[예시 2]
이 소설에선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이 영원히 평화로워질 수 있다고 상상해봐. 세상의 모든 전쟁과 살육이 완전 멈추는 거지. 그 대신 죄 없는 한 아이를 고문해야 해. 그렇다면 넌 이 아이를 고문할 수 있겠어?" 분명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는 아이를 고문시키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얘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합니다.
물론 공리주의자도 이런 답안을 이해합니다. 당연히 아이도 고문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한 아이를 고문해서 수백만 명을 구할 수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는 것을 막을 수 있따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어려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에 공리주의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 참 훌륭한 예시네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겠지만요. 그래도 대답해야 한다면 전 아이를 고문하라고 할 것입니다."
[예시 3]
이와 비슷한 예가 또 하나 있습니다. 어슐러 르 권의 SF 단편 소설 중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오멜라스는 상상 속 마을입니다.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한 곳입니다. 하지만 한 명이 불행해져야 나머지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소설 제목이 암시하듯 한 아이의 비참한 불행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마을에 머물지 않고 떠나려 합니다.
이 책의 작가 어슐러 르 권 역시 마을을 떠나려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속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를 고문한다고 세상이 나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에선 한 아이가 부당한 고문을 받더라도 더 많은 불행을 피할 수 있고 영원히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공리주의가 최선의 윤리 이론인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설명하는 수 많은 윤리 이론이 있지만, 전 그중에서도 공리주의가 최선의 윤리 이론이자 가장 옹호할만한 윤리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다른 이론을 살펴보겠습니다. 특정 도덕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마누엘 칸트의 이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절대 다른 사람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는 대해서는 안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칸트는 무엇이 도덕적 행동인가에 대해 물으면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닌 동기"라고 답했습니다. 즉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또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항상 잘못된 행동일까요?
[예시 1]
영국의 현대 철학자 데릭 파빗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무너지는 건물 안에 갇혀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지진이 나서 건물이 무너졌다고 가정봅시다. 그런데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내 딸에게 떨어지려 합니다. 그것이 떨어지면 내 딸은 분명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콘크리트가 막을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진으로 의식을 잃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 다리를 콘크리트 아래 받치면 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을 잃어서 당신 결정에 동의할 수 없는 그 낯선 사람의 다리는 부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도 될까요? 즉 딸에게 떨어지는 콘크리트를 막자고 낯선 사람의 다리를 이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공리주의자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다리를 잃을 뿐이지만, 딸은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이론대로 타인을 절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행동이고 그래선 안됩니다. 콘크리트가 떨어져 딸이 죽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이러한 사례를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상황에 부딪혀 결정을 내릴 때에는 최선의 결과를 낫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을 닥치면 절대적인 규칙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로 인해 우리가 공리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윤리관의 경우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실제로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선 기존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더 많은 고통과 불행을 낳을 수 있습니다. 또 저는 공리주의가 현실적이여서 좋습니다. 공리주의는 어떤 추상적인 원칙이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 즐거움, 쾌락, 비참함, 아픔, 고통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린 행복과 쾌락을 누리길 원합니다. 고통이나 불행은 원치 않습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하지만 공리주의에 반대한 토머스 칼라일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19세기 초 제레미 반담이 주장한 공리주의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도덕인가에 대한 대답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오직 고통과 쾌락에 달렸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칼라일은 공리주의를 두고 "만약 쾌락과 행복에만 신경쓴다면 그건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철학이다!"라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돼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진흙에서 놀고, 성적인 쾌락을 즐깁니다. 칼라일은 분명 인간이 돼지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돼지에게 좋은 삶이 인간에게 좋은 삶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벤담의 공리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이것은 공리주의를 오해한 것입니다. 벤담이 정말 하고싶었던 말은 돼지가 즐길 수 있는 유형의 쾌락에만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존재가 경험하는 쾌락이든 쾌락은 모두 중요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공리주의의 목표는 행복을 최대화하고 고통은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공리주의자는 바로 그런 목표를 실현하기를 원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리주의자는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에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행복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비슷하다면 말입니다.
공리주의에서 고려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국적이나 인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종교, 성별 또한 상관없습니다. 같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던, 먼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던 동등한 고려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말합니다. "우리 자신만 고려할 것이 아닌,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를 고려하자고 말입니다."
'TV > EBS, 위대한 수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터 싱어 - 실천윤리학, 3강 동물 해방 : 이론편 (0) | 2023.06.20 |
---|---|
피터 싱어 - 실천윤리학, 2강 효율적 이타주의 (0) | 2023.06.19 |
리처드 니스벳 - 생각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5강 지능: 유전인가? 환경인가? (1) | 2023.06.15 |
리처드 니스벳 - 생각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4강 무의식, 원초적 능력 (0) | 2023.06.14 |
리처드 니스벳 - 생각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3강 의식의 지배자, 무의식 (1) | 2023.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