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EBS, 위대한 수업

주디스 버틀러 - 젠더, 3강 언어의 장벽

셩잇님 2023. 6. 2. 06:00
반응형

 

 

3강, 언어의 장벽

 

 먼저 다시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는 20세기 주요 페미니스트 철학자입니다. ≪제2의 성≫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1949년에 발간된 그 책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고려하지 않은 한 가지 가능성은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입니다. 이미 말했듯 그들의 존재는 성별의 지정에 균열을 냅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단어와 새로운 범주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삶에 더 부합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남녀라는 기존의 범주에 새로운 개념인 젠더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새로 추가된 젠더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젠더를 삶 속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는 아닙니다. 보부아르의 논점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젠더가 처한 이러한 제약과 자유 사이의 모순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성별, 사실상 젠더는 각자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논의가 조금 이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미 말했듯 젠더라는 개념은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도 생소한 단어입니다. 사실 보부아르가 사용한 단어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차이를 제시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생물학적 성별이 특정한 사회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별이 젠더와 필수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들어 유년기에 여자로 불린다는 것은 특정한 발달 모형에 따라 특정 방식으로 자랄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애, 결혼, 가족처럼 특정 구조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보수가 적은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를 보면 성별은 과학이나 지적지각만을 통해 만들어진 단순한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는 언제나 외모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행태와 역동적이고 상호구성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성별의 역동적 성격은 반복해서 간과됩니다. 성별이 단순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성별에 관해서 얘기할 때 당연히 신체와 문화의 상호작용도 얘기하지 않습니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성별과 젠더의 구분은 여기까지 말하겠습니다.

 


 

 이제 성별이 다른 언어들 속에서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확립되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성별의 범주는 언어의 문제일까요? 그 어떠한 언어라도 영어도, 한국어도, 헝가리어도, 타갈로그어도 성별이라는 단어를 독점할 힘이나 권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강연이 지금 여러분에게 닿을 수 있는 것도 번역가의 작업 덕분입니다.

 

 언어가 우리의 성별을 규명하고 구성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성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언어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섹스, 즉 성별이라는 단어의 문화적 해석이 언어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더욱이 성별이라는 단어가 언어의 저항으로 인해서 만국 공통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즉. 모든 시대와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성별 해석이 있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주장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언어도 다양하고, 그 다양한 언어가 성별이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강의의 핵심이 될 중요한 2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핵심 1. 성별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별의 언어적 형태는 제 생각에는 사회적 성, 즉 젠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핵심 2. 젠더는 외래어다.

 영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에서 젠더는 외래어입니다. 때문에 젠더는 번역가들에게 골칫덩이입니다. 젠더라는 단어는 아주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만 해당 언어로 번역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영어에서도 젠더가 현재 의미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영미권에서 조차 생소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젠더는 각 언어의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젠더를 전 세계적 맥락에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우리가 전 세계 사람들과 젠더의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번역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젠더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젠더라는 단어가 그들의 모국어에서는 전혀 맞지 않으며, 그 단어를 쓸 방법조차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젠더에 속하는 것일까요?, 젠더가 인간을 분류하는 보편 범주 혹은 두 개의 다른 범주일까요?, 아니면 인간을 특정하는 범주일까요 비 영어권에서는 젠더라는 단어가 문장에서 어떻게 쓰일까요?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젠더라는 단어의 해석이 그 단어가 전제되고 실행되는 것에 문화적 관습과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젠더라는 단어의 번역 논쟁은 무엇을 얻고, 잃는지에 초첨을 맞추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잃는 것이 있지만 젠더라는 단어가 막 유입된 언어에서도 잃는 것이 있습니다. 젠더라는 단어가 영어 외의 언어로 유입될 때 우리는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젠더라는 외래어가 언어의 어떤 혼란을 수반하게 되는지 말입니다.

 

 젠더라는 단어가 다른 언어의 진입할 땐 영어도 함께 진입합니다. 많은 언어의 영어 단어의 점점 유입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모국어 파괴라는 문제라는 문제를 겪습니다. 사실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영어가 비 영어권 언어의 진입한 지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유입되고 있는 것입니다.

 

 젠더라는 단어가 영어의 형태로 다른 언어에 유입될 때 모국어 파괴는 분명히 발생합니다.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젠더라는 단어와 비슷한 새로운 단어가 고안될 때는 조금 다릅니다. 이 경우 젠더라는 단어의 형태는 사라지지만 새로 만들어진 언어의 영어가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있게 됩니다. 물론 이런 영어 형태 단어 유입에 대한 구체적 대응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영어식 단어를 다른 대체어로 교체해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체어 사용은 제가 오늘 강의에 마지막 부분에 얘기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곧 살펴볼 것이지만 젠더 단어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가장 우려하는 점은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 나아가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입니다.

 

 이 모든 주제들이 논의하기에 좋습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하기 좋은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은 미국, 영국, 호주의 학자들이 젠더를 어떤 범주나 개념으로 삼을 때 우리가 영어로 표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로망어에선 비교적 같은 표현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르 장르(Le genre)나, 엘 헤네로(el genero)와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어들이 언어의 무언가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개념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떤 영어 표현도 언어의 맥락에서 무한정 일반화 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젠더의 대해 논쟁할 때, 그러니까 젠더라는 단어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밝힐 때 이미 한 언어의 영역에서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젠더라는 단어가 외래어로 유입될 때, 이상한 외국어로 느껴지곤 합니다. 수입품이나 다른 국가의 침투처럼 말입니다. 다른 언어에 파고들긴 하지만 마치 외국에서 온 손님 같습니다. 가끔은 환영받지만, 가끔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외국어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 환영해야 하나?, 초대는 받은 걸까?, 출입국 심사는 통과한 것일까?' 젠더가 영어권 국가의 제국주의 징조, 지배 도구는 아닐까? 글쎄 문제 이긴 합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영어권 이론가들은 젠더가 내포한 가치 그리고 일반화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젠더라는 단어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쉽게 번역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젠더 이론가들이 항상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젠더에 대해 논의할 때 번역에 대해서는 특정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번역을 부차원적인 문제로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몇몇 영어권 학자들은 젠더 이론과 페미니즘 이론의 핵심 단어가 번역가능한지 조차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번역가들이나 관심 가질 일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우리는 번역가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느끼긴 하지만 우리의 주장이 사실상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동등한 개념을 확립하는 데에 달렸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합니다. 동등한 개념을 확립할 가능성. 그러니까 제가 지금 영어로 하는 말이 똑같은 의미에 한국어로 전달될 가능성입니다. 그것은 한국어의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가 있는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번역의 한계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단순히 젠더라는 단어를 번역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문제를 회피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써만 제대로 쓰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무척이나 오만한 단일언어적 전제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바라보면 이러한 생각은 철학적 고찰과 사유에서 생겨났을 수 있습니다. 젠더는 일종의 개념이고, 그 개념을 지칭하고 설명하는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언어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제 생각과 다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선 어떤 개념을 생성하지도, 유지하지도 못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개념은 그것에 이름 붙인 언어와 별개라는 것입니다. 젠더가 그 개념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젠더는 그것을 존재하게 하고, 이름 지어진 언어와 관계없이 분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에 반대합니다. 언어적 비동등성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젠더라는 단어가 그들의 안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언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하고, 그저 소란스러운 외래어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다국어로 젠더를 토론하는 것은 번역과, 번역의 한계, 그리고 오용이라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개념에 비동등성 문제가 발생할 때 국제적으로 발생하는 페미니스트와 젠더 문의는 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하나의 세계에서 어떻게 공존할지 말입니다. 다시 말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거나 젠더의 관해 똑같이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문제를 우린 어떻게 토론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과제는 이에 관해 좀 더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입니다. 영어가 지배하게끔 놔두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의 과제는 반 문화적 제국주의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전 세계 평등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노력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