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선택이 아닌 현실
몇몇 사람들은 페미니스트가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생물학 및 과학자에 종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여성은 생식 능력에 따라 정의되는 것일까?,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아이가 있는 여성보다 덜 여성스러운 것일까?' 만약 출산이라는 행위가 여성의 선택이라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것입니다. 어떤 여성은 아이를 낳기로, 어떤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선택한 것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똑같은 여성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은 자유를 사회에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여성의 대한 기대가 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는 커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런 기대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며 사회가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에 의무를 부과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생식능력이 여성이 지닌 생물학적 능력 중 하나를 명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어떤 존재이며, 그녀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규정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여성이 아이를 낳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출산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정말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아이를 낳아야 진정한 여성이고, 출산만이 진정한 여성의 표시라면 그것은 사회적 규범을 부과하는 일입니다. 출산능력은 있지만 출산을 원치 않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여성은 충분히 다른 삶을 원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은 여성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람이 어떤 사회 및 집단에서는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번식을 위한 생물학적 능력을 전제로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생물학적 능력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에 속해있습니다. 생물학적 능력이 결혼을 의미하지도, 결혼이 생물학적 능력에서 비롯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회는 인간의 생식 활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제도라 해도 생물학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성이 낙태를 선택하거나 아이를 입양 보내면 아이는 강한 사회적 압박과 비판을 받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했나요?, 페미니스트들의 시각에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인 자유를 행사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몇몇 여성들의 결정에 모든 여성이 동참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가족 제도가 붕괴하고,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끝은 국가, 더 나아가 문명까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두려움이 혹시 과장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여성들은 이성의 중심에 결혼과 가족 제도 안에서 아이를 낳기로 선택합니다. 또 어떤 여성은 가족 제도 밖에서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 이를 싱글맘이라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지만 아이를 낳지 않거나, 친구나 동거인과 살면서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고 입양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선택지가 있어도 괜찮을까요?, 페미니스트들은 괜찮다고 합니다. 비록 이성 간의 결혼으로 엄마가 되는 것이 보다 우세한 사회 형태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닙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모든 결혼 형태가 똑같은 가치를 가져야 하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생물학의 반대하거나, 생물학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과학에 종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의료와 법체계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가?'입니다. 여성을 그저 번식의 도구로만 간주하는 것이 아닌지, 여성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념이 어떻게 의학적 치료와 현대 법률에 반영되는지를 묻습니다. 만약 여성이라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거나, 임신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특정한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우가 삶의 규범을 만들게 됩니다.
만약 의사나 종교 지도자가 당신은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의 생물학적 성별로 인해 특정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통적 가족형태와 이성애, 남성 권위에 대한 복종, 불평등한 권리, 남성보다 덜 가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감각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 성별과 젠더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성별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예측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출생 시 주어진 성별로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 여성이란 성별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이성애와 결혼을 중대한 일로 여겨야 하는 현실에 놓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성별과는 다른 젠더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과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 사회적 정체성, 사회적 현실, 진로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사실상 우리의 삶이 사회 안에서 얼마나 많이 구현된 것인지 새로운 해석과 사회 변혁이 얼마나 열려있는지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 생물학적 여성으로 판별된 사람이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 생물학적 남성으로 판별된 사람이 사회에서는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정된 성별 범주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맞지 않은 범주입니다. 그건 그들의 삶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범주로 전환하려 합니다. 더 살만한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느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젠더가 그들이 부여받은 성별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젠더란 엄밀히 말하면 선택이 아닙니다. 아주 견고하고 불변하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진짜 그들의 삶입니다. 개인에게 젠더라는 현실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집니다. 이는 내적 필연성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법적 현실인 성별 정정은 선택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는 투쟁합니다. 젠더를 바꿀 의학적, 법적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젠더 범주가 그들이 사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일부 독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녀는 젠더의 범주를 논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논한 것은 오로지 여성의 범주뿐이라고"말입니다. 보부아르의 주장으로는 여자는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것이 사회 변혁의 과정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때로는 사회 규범과 벌이는 진한*한 협상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 진한 = 성내며 원망함.
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성별을 절대적인 현실이 아닌 상황으로 이해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성별을 이해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전부 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바뀝니다. 특히 성별과 젠더에 대해 말할 때 이러한 내용은 더욱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변화하는 젠더 범주에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디에 살던 남성의 역할, 또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대게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반응하면서 변하거나 때론, 다른 문화를 접하고 받아들이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세계 여행과 미디어, 그리고 문화지식의 순환을 통해서입니다. 남성, 여성, 아니면 새로운 젠더가 된다는 의미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 따라서 변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제2의 성≫은 다양한 학문 간의 연구가 필요했습니다. 이 책은 여성과 같은 범주가 정치적, 사회적, 심리학적, 생물학적, 경제적인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강의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한 단 한 문장에 시간을 많이 썼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공들인 이유는 성별과 젠더의 차이가 페미니스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통해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유를 확대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남성이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항한 것입니다. 여기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선언은 적어도 3가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1. 보부아르가 단순히 여성만을 고려했다.라는 것입니다. 보부아르가 성별의 개념만 얘기했을 뿐, 젠더 개념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부아르 이후 저와 같은 학자들이 젠더 개념을 논의에 끌어 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일부는 주장합니다. 젠더라는 개념이 미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이론을 방해한다고입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과연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의 작업에 대해 제가 주장하는 모든 말을 인정할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비판자들도 저의 이러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여성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떤 사상을 따를 수 있을지 없을지, 출산, 친족, 결혼, 섹슈얼리티에 관계된 어떠한 인과론적 결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저의 견해를 하나 더 추가하겠습니다. 지정된 성별 또한 어떤 젠더를 가질지 결정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2. 남녀 범주는 항상 이성애의 틀을 전제로 할까?라는 것입니다. 모니크 위티그의 급진적 레즈비언이즘은 여성의 범주 자체의 의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주장했습니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이성애를 섹슈얼리티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젠더는 다르게 보일 수 있을까요?
3. 우리가 과연 성별 간의 물리적 차이를 지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시선은 항상 성별이라는 특정한 틀 안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별을 바라보고 다르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성별 차이를 규명한 역사적 방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가설에 종종 특정한 편견이 들어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별의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늘 그것이 연구되는 인식의 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별의 차이는 우리가 찾으려 할 때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그것을 찾으려 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식의 틀입니다. 그 틀을 통해 성별의 차이를 특정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논쟁들 가운데서도 하나의 공통된 예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성별의 범주는 정해진 사실이라기보다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회적 역사적 과정들과 특정한 권력이 성별을 구별하는 행위에 압박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체로써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 근본적으로 결정되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여성은 그들의 상황 속에서 자유롭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상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 어떤 자유도, 평등도 투쟁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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