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논쟁의 중심
젠더가 가지는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학문과 페미니스트, 퀴어, 트렌스 젠더 영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젠더, 혹은 젠더라는 용어가 일상 언어로 자리 잡는 것을 거부하거나 용어 자체에 경악하는 사람들이 쓰는 젠더의 의미가 다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젠더의 개념이 국제적으로 치열하게 논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폴란드, 터키, 세르비아에서는 젠더의 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젠더가 성에 대한 청교도적 탄압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성은 성적 취향을 의미합니다.
젠더라는 용어가 한 때는 페미니스트와 퀴어 이론을 의미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언어로 퍼져가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젠더는 싸워야 하는 망령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젠더라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젠더가 다양하게 수용되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정교하게 다듬어 온 젠더 이론들이 망령의 존재로 변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젠더 논쟁의 화두는 이렇습니다. 젠더나 젠더 연구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국가가 막아서야 하는가?, 일부 비평가는 젠더나 젠더 연구가 젠더 자체를 없애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한다음, 글로벌 논쟁에서 젠더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페미니스트와 젠더 연구자들이 논의하는것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새로운 존재인 젠더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젠더 그 자체를 초월할 수 있을지, 어떠한 젠더 범주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지를 논의합니다. 저는 지금 남녀가 아닌 다양한 젠더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오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젠더를 표현할 다양한 언어와 젠더로 구분된 현실을 살아갈 많은 방법이 있는 세상을 말입니다.
젠더에 대해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서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이러한 것이 대단히 즐겁지 않더라도 이것 또한 좋습니다. 그들에게 젠더 범주란 세상을 즐겁게, 잘 살기위한 조건입니다. 그들은 그 젠더 범주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을 인지하고, 안정감을 느끼려 애씁니다. 자신을 부르는 성별 대명사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윤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들의 주장은 조건없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이 특정 젠더에 속한다고 말하며 특정 대명사로 불리길 원한다면 우리는 받아들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의문을 던져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이름을 붙이며 그 안에서 얻는 자존감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반대로 이분법적 젠더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트렌스 젠더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남녀 이분법적 젠더 범주를 넘어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젠더 용어가 필요합니다.그 용어를 쓸 때 비교적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배적 언어를 거부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럼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 젠더가 필요한 사람과, 젠더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이 되고 싶은 사람이나,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이 되어 이분법적 성에 포함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일부 존재합니다. 그들은 젠더 범주를 원합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젠더 범주를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일부는 자신이 이분법적 범주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며 새로운 젠더 어휘를 만듭니다. 우린 이 모든 스펙트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젠더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하나의 젠더로만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규범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도 이런 젠더 용어의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면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거나 살아가는데 필요한 무언가를 빼앗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입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젠더의 연관성에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앞서 언급한 모든 입장에 함부로 반대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서로가 다른 젠더 범주의 사람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고 살만한 삶, 행복한 삶, 어떤 이상적인 삶에 희망을 준다면 반대할 수 없습니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모두가 같은 젠더 용어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젠더 규범을 강요하지 않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요하거나 어떻게 부를지를 상의없이 결정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일부는 기존의 젠더 범주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더 숨통이 트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그런 젠더 범주 안에서 인정받으며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언어나 사회 안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며 기존의 없던 젠더 용어를 직접 만들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삶의 방식을 하나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대신 투쟁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젠더 용어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투쟁은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우리에게 가능성 있는 미래를 열어줄 것입니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격이 최근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젠더라는 용어는 서양이나 북반부, 미국의 고상한 도시에서나 쓰는 용어를 들여온 것이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제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지역이나 국가 문화에 침투해 가족과 남성의 개념, 심지어 문명까지 위협한다고 비난을 받습니다. 이것은 반젠더 이데올로기 담론과 비슷한 특성을 보입니다.
이들은 젠더가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며 자연의 질서를 흔들고 이성애 중심의 가족 제도를 분열시키는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남성이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를 잃거나 공멸*될까 두려움을 가집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젠더를 바꾸라는 교육을 받게될까봐 두려워합니다. 젠더를 가르치는 곳에서 동성애자가 생길까봐 우려합니다. 젠더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면 성적 도착이 홍수처럼 인류를 덮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들은 여성의 생식 능력에 자유를 누리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트렌스 젠더의 법적, 사회적 권리를 부정하고 젠더와 성차별에 대앙할 법적 제도적 보호조치 마련에도 반대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때에는 페미니즘이나 좌파적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젠더 옹호자들을 비난합니다.
* 공멸 =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함.
이러한 보수세력이 젠더에 대해 비판하는 일부 주장은 반박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저는 이들이 가진 모순과 불일치를 반박할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반 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회 전역에 널리 퍼져있는 두려움과 불안에 호소합니다. 그 불안을 부추기고 그 불안에 호소하면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젠더라는 용어에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불안을 끌어들입니다. 경제적 불안정성, 인프라 붕괴에 대한 두려움, 의료시스템에 붕괴, 사회 보장제도의 붕괴, 국가 정체성이나 백인 우월주의에 상실등을 포함합니다. 많은 이들의 삶이 파괴된 것을 젠더라는 용어 탓으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젠더라는 용어가 사실상 사회 전반에 어떤 불안정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 폴란드의 두다 정부는 젠더나 젠더 연구에 대한 반대를 지지합니다. 젠더는 코스타리카에 선거 연단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브라질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여러곳의 젠더 연구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습니다. 2020년 12월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학교 안에서 젠더 논의를 금지한 정부 조치를 폐지했습니다. 젠더 검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젠더 이데올로기를 공산주의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폴란드에서는 100곳이 넘는 지역에서 성 소수자 반대 구역을 선포했습니다. 성소수자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일단 젠더가 정치 체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면 젠더는 일종의 망념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때론 악마의 소행이나 순수한 파괴의 힘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반동적인 정치 세력은 젠더를 이렇게 여깁니다. 젠더란 자민족주의, 반지성주의, 검열, 그리고 추방과 국경 봉쇄를 통해서만 억제할 수 있는 지독히 끔찍한 위험요소라고 말입니다.
젠더 연구가 한 일이 무엇인가요? 젠더 개념이 근심과 공포심을 일으켰나요? 그저 젠더는 남성의 사회적 우월성에 의문을 던진 것입니다. 여성의 재생산 권리와 자유를 강조해왔습니다. 누군가의 삶과 사랑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양한 대체 가족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트렌스 젠더의 법적인 지위를 변화시키고 의료와 법적으로 성 전환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또한 여성을 향한 폭력, 성폭력, 젠더 비 순응자를 향한 폭력에 반대했습니다. 모두가 더 마음을 열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삶도 동등한 가치를 고려해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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