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까지 저의 강의에서 함께 논의한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물학적 성, 섹스와 사회적 성 젠더에 구분을 다루었습니다. 또한 젠더 개념을 잘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젠더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갖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관해서도 얘기했습니다. 젠더가 외부에서 온 개념이다. 라던가, 기존의 삶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였습니다.
첫번째 강의는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기반했습니다. 생물학적 성별 지정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지, 직업이나, 임신과 관련하여 어떠한 선택을 내릴지를 예측하거나 통제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두번째 강의는 젠더라는 단어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외래어라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영어 단어이며 다양한 언어의 젠더이론이나 사회 운동에는 반드시 해석의 문제가 개입한다고 말했습니다. 단, 하나의 언어가 젠더라는 용어를 독점할 수 없으며, 그러니 모든 젠더 이론이 영어권에서 발생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단일어에 대한 비판은 세계적인 젠더 운동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영어권 활동가들이 단일언어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어권 사람들이 젠더를 자기 존재에 일부로 이해하고, 그것을 더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영어를 다듬는다면 결국 영어에 더 의존하게 되고, 영어 단일언어주의를 심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젠더의 범주를 감옥처럼 느끼는 사람들과 자신이 포함된 범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린 충분히 넓은 틀이 필요합니다. 젠더 범주 안팎의 사람들과 새로운 젠더 단어를 원하는 이들이 모두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했듯 우리는 지금 국제적으로 젠더가 치열하게 논의되는 사회에 살고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함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어 사이에서 이동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젠더 연구가 한 일이 무엇일까요? 젠더 개념이 근심과 공포심을 일으켰나요? 그저 젠더는 남성의 사회적 우월성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여성의 재생산 권리와 자유를 강조해왔습니다. 누군가의 삶과 사랑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양한 대체가족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트렌스젠더의 법적인 지위를 변화시키고 의료 또는 법적으로 성전환의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또한 여성을 향한 폭력, 성폭력, 젠더 비순응자를 향한 폭력에 반대했습니다. 모두에게 마음을 더 열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른 삶도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고려해달라고 말입니다. 결코 남성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남성 우월주의에 도전했을 뿐입니다. 가족 제도를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종류의 가족이나 연대도 똑같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파괴한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과거의 주장처럼 절대적인 사실인지 질문했을 뿐입니다.
젠더는 기존의 젠더 범주에 도전했습니다. 남녀만이 유일한 범주일까요? 더 많은 다양한 젠더가 존재할 수는 없을까요? 다국적언어의 틀에선 젠더가 어떻게 보일까요? 알다싶이 세계 많은 국가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사회/복지 사업의 지출을 삭감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적 자원을 받기 위해 교회와 가족에 더 의존하도록 했습니다. 국가가 사회/복지 사업을 포기하고 공동체와 가족이 그 틈을 메울것을 기대했습니다. 국가는 사회/복지 사업을 외부에 위탁하며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젠더 교육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강의, 책, 전시를 검열하며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할 LGBTQI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브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스트와 성 소수자 운동의 대한 반발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젠더 운동은 UN이나 이스탄불 협약*과 같은 진보적인 정책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은 반젠더 운동이 좌파의 논리를 사용해 젠더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젠더가 제국주의적 개념이라고 호소합니다. 지역 문화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차별에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와 트렌스젠더를 혐오할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성애자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동성애과 트렌스젠더 혐오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지를 않을 뿐입니다.
* 이스탄불 협약 = 2011년 45개국과 EU의 서명으로 시작된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및 예방을 위한 국제 협약
이 모든 공격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삶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 가족의 존재가 이성의 가족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성애 가족은 계속 행복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다른 형태의 연대를 원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페미니스트는 종종 경찰이나 검열기관처럼 여겨지곤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지금 얼마나 많은 정부가 페미니스트와 젠더 연구를 검열하는지 말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읽는 책들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논쟁에서 여러분만의 견해를 만들어주는 책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떠한 차별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검열 없이, 공동체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가고 숨 쉬고 일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공동체 삶인 공존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젠더 범주는 우리에게 제약일 수 도, 자유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남녀라는 젠더 범주는 깊이 고정되어 바꿀 수 없을 것 처럼 보이지만, 큰 변혁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젠더로 불리거나 어떤 성별을 부여받을 때 사회는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일련의 기대치, 이상적 관념, 관습이 우리에게 전달되어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 언어의 속하려고 노력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인 역사적 시간속에서 우리만의 길을 개척하려고 늘 노력중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주변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떄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성별과 젠더를 지정받으며 삶의 긴 과정이 시작됩니다. 삶의 과정은 한가지 발달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신학이나 의학적 권력으로도 삶을 예측이나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에게 젠더가 부여된다면 그 젠더라는 범주는 아이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젠더는 아이에게 무엇을 원할까요?, 아이는 젠더로부터 무엇을 얻고 싶을까요?, 이것이 젠더 규범속에서 공통된 삶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배제하는 용어들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연대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젠더의 대한 공격은 페미니즘과 LGBTQI 그리고 트렌스 젠더 권리에 대한 공격이라는 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공격을 받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트렌스젠더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트렌스젠더 혐오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라면 젠더의 의해 누군가가 차별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 이러한 선언, 이 중요한 원칙은 다양한 운동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연대할 길을 열어줍니다. 반젠더 이데올로기의 표적이 되는 운동에서 연대를 확립해줍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하고싶은 말은 우리가 젠더 범주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젠더와 함께 사는 것은 평생의 노력입니다. 누군가에겐 쉽지만, 누군가에겐 매우 어렵습니다. 젠더는 우리의 범주를 주장하고 우리의 언어를 만들 수 있도록 자유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이미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늘 영향을 미치는 언어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긴 역사속에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언어라는 것.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친밀한 언어조차 우리의 것이기도 하며, 아니기도 합니다. 타인이나 혹은 더 큰 세상에서 탄생 이전의 역사에서 옵니다. 우리를 파악하고 정의하는 용어는 번역이 될 수도, 안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젠더 세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위해 여러 언어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언어의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여전히 생겨나는 잠재력을 발견합니다.
젠더라는 용어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지,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엇을 괴물로, 정상으로 볼지 결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젠더 용어 안과 밖에 미치는 우리의 힘을 알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의 과제는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더 살만한 방식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남들과 다르다거나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좋은 삶이란 무엇일지 고민할 때 하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다양한 개성과 다양한 언어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순조롭게 자유를 찾고, 두려움을 떨칠 수 있습니다.
일부 국가의 학생들은 젠더를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서만 배우고 있습니다. 책이나 번역본을 찾아보지만,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합니다. 제 생각의 학생들에게도 연대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요구해야 합니다. 젠더를 배운다는 것은 문학을 배운다는 것, 영화를 배운다는 것, 역사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젠더는 어떤 분야에서도 발견됩니다. 학생들은 학교나 관련 기관에 주장해야 합니다. 젠더는 세상을 탐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을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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