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내레이션
> 어떤 사람은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30년 전, 세계 철학사의 파격적으로 등장한 트러블 메이커, 그렇지만 짐작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강연이니까요.
오늘 주제는 젠더입니다. 젠더라는 단어. 이는 무엇을 나타낼까요?, 젠더란 무슨 뜻일까요?, 한국어로 젠더라는 단어를 번역이나 할 수 있을까요?, 젠더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성별과 같은 말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일까요? 우리는 젠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이 단어가 본디 영어 단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어 외의 언어에서도 이제 막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또한 젠더는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해 온 단어이기도 합니다. 학계의 젠더 이론가들과 철학가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지만, 젠더라는 말은 세상 사람 대부분에 생소한 단어입니다. 영어 외의 모든 언어권에서는 이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논의할 젠더 이론이 무엇이든 간에 이 단어의 해석이 핵심 과제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세계 일부지역에서는 젠더 개념의 대해서 반감을 보입니다. 이 개념이 외부에서 온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맥도날드나 의류브랜드 갭과 같이 미국의 문물처럼 생각해서 반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국어에서 전통적으로 남녀차이를 규정하는 언어, 성별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일부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젠더는 성경적 가르침이나 전통적인 도덕성과 충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운 젠더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트랜스젠더나 퀴어가족처럼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입니다. 가끔 우리는 젠더를 축약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젠더를 페미니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거나, 동성애자나 성 소수자의 권리를 뜻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젠더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왜 이 단어는 소란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먼저 시몬 드 보부아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20세기 주요 페미니즘 철학자입니다. 제2의 성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1949년에 발간된 책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선언은 성별과 젠더를 구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성별, 즉. 생물학적 실체로 이해되는 성별이라는 개념과 젠더, 즉.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 성별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뜻하는 개념을 구분하는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의미가 반드시 남성과 결혼해야 한다거나 오직 여성에게만 적합한 직업을 택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태어날 때 주어진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라고 해서 여자처럼 보이도록 특정 방식으로 말하거나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제도는 성의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사회제도로 간주합니다. 결혼은 사회가 생물학적 성별을 조직하는 방식입니다. 성을 기초로 하지만 생물학에 따른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에 따라 결정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걷는 방법, 말하는 방법, 심지어 사랑하는 방법조차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조직한 성별화된 몸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걷기, 말하기, 외모의 표현, 심지어 하는 일조차 일종의 사회적 행위입니다. 그중 일부는 스스로 결정하지만 그것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과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일부는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 따라 결정됩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성별과 젠더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해졌습니다. 생물학적 실체로 이해되는 성별이라는 개념과 특정한 사회에서 성별이 떠맡는 사회적 의미인 젠더의 개념으로서 말입니다.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결정도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이라는 성별과도 무관하다."라는 통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자녀를 낳을지 말지에 대해서입니다. 한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해서 꼭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이라면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아이 낳는 것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은 여성이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여성 그 자신입니다.
성별과 젠더의 구분은 여성에게 자유의 지평을 열어주었지만, 이것은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젠더 규범의 제약을 받습니다. 남성들도 무엇이 남성적인지,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자랍니다. 이러한 생각에 강박관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도전받고, 뒤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살지, 외모가 어떠할지, 누구를 사랑할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제 말이 우리가 성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일까요?, 이는 아닙니다. 제가 볼 때 자유라는 것은 항상 특정한 문화, 특정한 사회에서 생겨납니다. 때에 따라 자유로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란 투쟁입니다. 자유는 사회적 규범과 관습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규범과 관습을 바꾸려는 노력은 때에 따라서 정말이지 굉장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젠더의 의미를 항상 자유롭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늘 제약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회적 압박과 전통의 압박 아래서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고정관념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젠더란 이러해야 한다며, 의료계와 법률, 정부가 목소리를 높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찾은 자유는 어떤 것이던 투쟁의 결과일 것입니다. 이는 전통과 규범과의 투쟁입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선언은 이렇게 해석되었습니다. "성별은 선천적 범주이고, 반면에 젠더는 그 선천적 범주를 문화적, 사회적으로 해석하는 명칭이다.", 사실 성별의 개념 자체에는 의미나 가치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그 의미를 얻습니다. 성별과 젠더의 구분은 최근 몇 년 사이 변하고 있습니다. 성별이라는 개념조차 다양한 방식으로 결정된다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도, 문화, 언어, 의학적, 과학적 관습의 역사에 의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초창기 의학적 관점에서 성별은 오직 남성들에게만 있었습니다. 유일한 성별은 남성이었고, 남자들의 성기는 유일한 성별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여성들은 결핍된 존재였습니다. 음경이 없으므로 결핍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출생 시 성별을 식별하는 의학 보고서에 조차 여성의 성기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성별을 의미하는 섹스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무엇을 번역하나요? 중국어, 핀란드어, 포르투갈어 등 모든 언어는 아마 뉘앙스와 어감이 모두 다르고 연상시키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때로는 성별을 구분하는 데 필요한 문장 구조가 완전히 다르기도 합니다.
만약 성별 분류의 역사적 흐름이 있고, 언어마다 성별 분류 체계를 다르게 구축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과학에서 신체차이의 따른 성별의 특성을 규정하는 데에 역사적으로 각기 다른 방식을 보여왔다면 그럼 성별 문제는 생각보다 다소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성별이고, 저 사람은 저런 성별이라고 단정 짓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을 특정 성별로 칭할 때 여기서 성별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여러분의 생각을 복잡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사항을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바로 '간성'(=InterSex)인 사람들.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성을 모두 지닌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말하는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분법이란 무엇일까요?, 이분법적 관계란 무언가가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에만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이렇게 이 분법에서는 두 가지 경우만 존해잡니다. 하지만 간성인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모두 가집니다. 그들은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이분법으로는 그들의 존재나 성별에 관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체가 오직 두 가지 형태 즉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며, 그 둘은 상호 배타적이라곤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90% 이상이 이분법으로 구분된다고 해도 꽤 다수의 사람 많이 해당하는 것일 뿐 모든 인간 사례를 포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부 남성을 보고 여성스럽다고 말하거나 일부 여성을 보고 남성스럽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인간을 오직 두 종류,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하는 것일까요. 결론을 맺으며 저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성별 구분에 관한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그 어떤 보편타당한 주장도 존재할 수 없다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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